1, 기존 텍스트에서의 ‘싸우는 여성’

 

가녀린 여성의 몸으로 전장을 휘젓고 다니는 아가씨들에게 열광하는 것은 비단 현대에 한정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고대의 예로 신화상의 ‘아마조네스’를 들 수 있을 것이며, 중국의 ‘뮬란’, 한국의 ‘자청비’, ‘이설죽화’등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밖에도 미국의 히어로물이나 드라마 등에서도 작품 내적으로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는 여성은 상당히 보편적인 소재이다.

그러나, 이들은 여성성을 잃어버린 경우가 대부분이다. 영웅으로서의 면모가 부각될 뿐이었으며, 이성에게 느끼는 연애 감정이나 소녀다운 감성은 생략되곤 했다. 기존의 여자 전사들은 간혹 '아름답다'는 묘사가 있다 하더라도 전사로서의 각성을 하는 과정에서 여성성을 잃었다. 다시 말해, 이런 여자 전사의 경우에는 필요에 따라 남성성이 강조되는 일이 많다는 이야기이다. 구미권의 원더우먼의 경우, 과격한 성격도 남자 못지않고 체격도 근육질이며 무엇보다 기본적으로 캐릭터의 설정 자체가 ‘여성의 육체를 지닌 남성’에 가깝다. 이러한 구미권의 여자 영웅들은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연애 상대라기 보단 우러러봐야 하는 신화 속 여신의 캐릭터와 비슷하다. 남성들에게 현실적인 거부감을 주지 않을 하나의 장치로써 일부러 현실과 크게 단절시킨 것이다.  

 

 

 


2, ‘세일러 문’은 무엇이 달랐는가?

 

그러나 ‘세일러 문’은 기존의 여성 캐릭터와 상당히 이질적이었다. 작중의 세일러 전사들은 여성적 순진무구함과 귀여움이 거의 완전한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 다시 말해 ‘싸움’과 ‘여성성’을 동시에 확보했다는 점에서 혁신적이었다. ‘세일러 문’의 캐릭터들은 굉장한 전투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름답고 가냘픈, 지극히 여성스러운 외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남성과의 연애에도 관심이 많다. 심지어 소녀의 상징인 치마 달린 교복을 입고 싸울 뿐만 아니라, 전투 상황에서도 사랑을 강조한다. 이는 ‘세일러 문’의 콘셉트 자체에서 기인한다. 어린 여학생과 성인 남성층이란 완전히 상반되는 두 소비층을 동시에 잡기 위해 이러한 기형적인 영웅이 탄생된 것이다. 방영이 시작되자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PC 통신상에서 ‘큰 친구(아동용 만화를 좋아하는 성인 남성을 지칭하는 말)’란 은어가 생겼으며, 남자 고등학생에서 내무반의 군인까지 모두가 ‘세일러 문’ 일색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원더우먼’의 서구권에서도 크게 반향을 일으켰다. 단적으로 미국에서는 2012년에 재판(再版)이 나왔는데 그게 웬만한 서점 랭킹 20위에 안에 들어가고, 구체 관절 인형 등 관련 상품이 아직까지 꾸준히 팔리고 있다. 일본 현대사 교과서는 이를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 기록하고 있다.

‘세일러 문’이 공식화한 ‘싸우는 소녀’의 도식은 후대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넓게 보자면 최근 개봉한 미국 영화 ‘킥 애스’의 주연 캐릭터 ‘힛 걸’도 ‘세일러 문’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남성들이 ‘세일러 문’에 그토록 열광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분명 ‘세일러 문’은 소녀용 만화지만, 현대 사회 남성들의 기호가 반영된 여성들이 나온다. ‘정복욕’과 ‘외부에서 보호받고 싶은 심리’, 그리고 ‘남자로서의 우월감’이 하나로 합쳐진 것이다. 남성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태어나면서부터 본인의 감정 표출을 억압받은 채 겉으로 강인하게 행동해야 하는 사회적인 시선 속에 살아야 하는데, 그런 남성의 모순을 해소해주는 존재 중 하나가 ‘싸우는 소녀’인 것이다. 강하면서도 아름다운 세일러 전사는 이런 남성의 욕구(무의식중에 여성에게 보살핌을 받고 싶어 하면서도, 또 여성을 지켜주고 싶은)를 충족시킬 수 있는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남성의 전유물이라 여겨지는 ‘무기’를 들고 처절하게 싸우는 세일러 전사에게서, 남성들은 ‘여동생이면서도 누나 같은’, 역설적이지만 이상적인 여성의 모습을 발견한다. 한마디로 세일러 전사란 남성들의 나르시시즘 투영에 의해 만들어진 캐릭터다.

또한, 세일러 전사들은 특유의 전투 능력을 얻게 되는 과정에서도 소녀 같은 모습을 상실하지 않았다. (일례로, 주인공 ‘세라’는 멋모르고 달의 왕국을 시중들던 고양이 ‘루나’의 이마 반창고를 떼는 바람에 세일러 전사가 된다.) 특정한 사건에 의해 예기치 않게 능력을 얻은 것이다. 때문에 강력한 전투능력을 가졌음에도 전투를 치루지 않을 때는 또래 소녀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생활한다. 쇼핑을 하고, 다이어트를 하고, 남자와 데이트를 하는 등, 사춘기 소녀의 고민을 하는 영웅의 모습에서 우리는 인간미와 반전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세일러 문’은 전투 장면 못지 않게 러브 코미디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는 작품 고유의 섹슈얼리티로 적용되었다. 현실성과 설득력을 포기해서라도 이상적인 여성상을 추구하려는 의도로 풀이될 수 있다. 

 

 

 


3, 유일한 남성 등장인물, ‘턱시도 가면’

 

유일한 중요 남성 등장인물인 ‘턱시도 가면’에 대해서도 해석의 여지가 많다. 턱시도 가면(변신 전에는 ‘레온’이라고 불린다.)은 대학생인데, 나이에 맞지 않게 열네 살 세일러 전사에게 애정 공세를 펼치다가, 결국 중학생인 세라와 연인 관계가 된다. 이는 어리고 예쁜 여성에 대해 동경을 품는 남성들의 시선을 반영했기에 나올 수 있었던 설정이다. 턱시도 가면은 앞서 말한 ‘큰 친구’들의 감정 이입의 매개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 나이차에 대해 세라가 콤플렉스를 느껴 대학교 교과과목을 배우려 애쓰는 장면은 그야말로 남성 판타지의 절정이다. 

재밌는 건, 턱시도 가면의 본격적인 전투 장면은 얼마 없다는 점이다. 세일러 전사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멀찍이서 장미를 던지며 전술 조언을 하는 것이 전부다. 직접 전투에는 의외로 약해서, 인질이 되는 수모를 겪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세일러 전사들의 정신적 지주로 여겨지고 있으며, 팀의 전략을 담당한다. 턱시도 가면의 지략이 없었다면 세일러 전사들은 진작 전멸했을 것이다. 턱시도 가면의 입장에서 세일러 전사들을 정리하자면, 세일러 전사들은 신체 물리적으로 ‘남자’보다 우월하지만, 그러면서도 남자가 듬직하게 옆에서 지켜주어야만 하는 모순과 분열을 갖춘 캐릭터들이란 것이다. 현대 남성들의 ‘보호 받고 싶다’와 ‘보호해주고 싶다’는 두 심리가 충돌한 결과, 서로 상호 보완을 해주는 ‘턱시도 가면’과 ‘세일러 전사’가 출현한 것이다. 

 

 


4, 시대에 부응하다

 

나아가, ‘세일러 문’이 방영되던 90년대 초반, 대중문화의 흐름에 대해서도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그 이전 같으면 ‘세일러 문’은 남자의 열등감을 자극하는 만화라서 남자들에게 큰 반향을 이끌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세일러 문’은 정신적으로 연약할지언정 신체 물리적으론 남성보다 우월해서, 매번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턱시도 가면)를 지켜준다. 여기서 남자들은 열등감을(비록 허구의 이야기지만) 맛본다. 성역할이 반전된 것이다. 하지만, 온갖 매체가 범람하여 자극의 역치가 점차 올라감에 따라, 보는 이가 내면의 판타지 속의 자신과 매체속의 자신을 동일화하는데 무관심해졌기에, ‘세일러 문’은 남성들의 마음을 파고 들 수 있었다. 상처 표면을 조금씩 찔러 미묘한 쾌락을 얻듯이 사람들은 본능에 반하는, 열등감을 즐기고 향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세일러 문’은 여기에 승부수를 건 작품이다. 시대가 아니었다면 다소 불편한 작품이 될 수 있었다.  

 

 


5, 우리의 열광은 온당한가?

 

이쯤에서 질문이 하나 필요하다. ‘세일러 문’을 바라보는 이러한 남성들의 시선은 문제시되어야 하는가? 자답하자면,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비뚤어진 성적 요소(싸우는 소녀에 대한 편애 등)을 그리는 만화나 영화에 열광하는 남성들은 현실 생활에서는 대개 평범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 현실과 허구를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가상의 여자’와 ‘현실의 여자’는 별개라는 것이다.

‘세일러 문’등 허구는 그 자체로 자립하고 있다. 다시 말해 결코 현실의 모방이 아니라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허구의 존재인 ‘세일러 문’에 대한 도착은, 그 자체로 상상의 닫힌 세계에서 자기 촉매적으로 끝없이 자기 증식할 뿐이다. 또한 평면적이고 현실과 동떨어진 조형인 이차원의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상대로 진실된 감정(사랑 등)을 느낄 이는 없을 것이다.

작품 내부에서도 ‘이 이야기는 허구’임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다. 예시를 들어 비교하자면 다음과 같다. 미국 영화 ‘콜롬비아나’의 주인공 ‘카탈리나’는 강간과 양친 살해 등으로 인한 정신적 외상, 억압 경험이 그녀를 전장에 몰아세우고 있다. 그것이 캐릭터의 현실성을 보장하고, 거기서부터 특유의 섹슈얼리티가 태어나지만, ‘세라’는 그러한 외상 경험과는 무관하다. 그녀들이 전투에 나서는 것은 대개 우연이다. 어디까지나 허구의 존재로서 허구의 세계에만 보장되는 현실성을 획득하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세일러 문’ 같은 데포르메화된 형상에 열광하는 것은 비뚤어진 일이 아니다. 이기적인 숭배나 무구함을 요구하는 것은 허구 세계의, 하나의 도식이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의 여성에게 절대로 존재할 수 없는 ‘순화’를 거친 것임은 의심할 바 없다. 또 덧붙이자면, ‘순화’를 거친 여성과 현실의 여성을 혼동하는 이는 사실상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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